스쿨버스
“깼어?”
게슴츠레 눈 뜨자마자 경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몽롱한 정신을 추스를 수 없어서 대답도 못 했다. 나는 진하게 몰아치는 햇빛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반쯤 벌어진 커튼 사이로 가드레일이 질주했다.
“깼으면 이거 읽어. 이번에는 범위 안에서 낸다고 했으니까, 믿어봐야지. 그래도 어째 교수님이 평범한 문제를 낼 것 같지가 않지?”
경운이가 나른한 목소리를 건넸다. 나는 무시한 채 창 너머를 홀린 듯 봤다. 보호난간 너머로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기시감이라고 여길 만큼 익숙한 전경이다. 하지만, 기시감은 아니었다. 어제도 봤고 그저께도 봤던 아파트가 천천히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입학 첫 날부터, 아니 합격통지서를 받으러 갔던 때부터 스쿨버스를 탈 때마다 본 아파트다. 나는 스쿨버스를 타면 항상 저 아파트를 봤다.
노리고 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나날이 우연이었다. 마치 고대의 의식처럼 나는 스쿨버스를 타면 항상 20번 좌석에 앉았다. 문 쪽에서 다섯 번째 열의 창측이다. 내가 앉을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먼저 앉는 것을 본 적도 없다. 가장 신기한 것은, 내가 일부러 다른 자리를 선택하려 들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스쿨버스의 일상은 거의 똑같았다. 오늘처럼 경운이가 내 옆자리에 앉을 때와 아닐 때의 차이가 전부였다. 나는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잠이 들었고, 항상 똑같은 곳을 지날 때 잠에서 깼다. 그리고 저 아파트를 봤다.
“평범한 문제를 낼 것 같지가 않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경운이가 딱딱 끊어지는 어조로 말했다. 대답해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내 시선은 여전히 아파트 단지를 향하고 있었다.
“낼 것 같지가 않지?”
좀 더 위협적인 어조였지만, 내 시선을 돌리지는 못 했다. 나는 어제도 봤고 그제도 봤던 한 지점에 시선이 묶여 있었다. 단지에서 다른 아파트보다 유독 하얀 아파트였다. 그곳 4층 베란다에는 안전창에 팔꿈치를 걸치고 선 여자가 있었다.
늘 그렇듯 여자는 미동하지 않았다. 언제나 똑같은 하얀 원피스에 푸른 색 가디건을 걸친 모습. 단정하게 빗은 것으로 추정되는 흑발의 일부가 어깨 일부를 뒤덮고 있다. 멀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꽤 미인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저 여자도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매일매일.
궁금했다. 버스를 타면 늘 같은 자리에 앉고, 항상 잠이 들고, 같은 곳을 지날 때 잠에서 깨고, 그럴 때마다 보게 되는 여자. 견딜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인 반복이었다. 한 때는 반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벼르고 있었다. 저 여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치한으로 몰려 경찰에게 끌려간다고 해도 꼭 저 아파트를 찾아가고 싶었다. 여자를 직접 만나서 우리 사이가 운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저 여자에게 친근함 이상의 짙은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같지가 않지? 응? 내가 사람 같지가 않지?”
내 목에 조르기가 들어왔다. 때마침 아파트도 멀어진 터라 나는 조르기의 괴로움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항복의 표시로 경운이의 팔을 두드리는 동안, 아파트는 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허무한 하루다. 고작 1시간 시험을 보려고, 편도만 1시간 반이 걸리는 학교에 와야 했다. 경운이는 버스에서 내게 무시당했던 한이라도 풀려는 듯 가장 많이 모인 무리에 합류해 사라졌다. 같이 가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가뿐히 거절했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녀석들은 술을 마실 계획이었다.
나는 한 달 가까이 찾지 않은 동아리방으로 갔다. 문이 잠겨있었다. 결국 식당으로 갔는데, 그곳도 너무 한산해서 자리 잡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다.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커다란 창 너머로 보이는 캠퍼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각 건물들을 죽 훑던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마치 유레카를 외칠 사람처럼 급히 일어났다.
“가자.”
내게 말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걱정되지도 않았다. 그저 한 번만 보고 싶었다. 직접 눈앞에서 그 여자와 짧은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다. 반드시 오늘 안으로 해치워야만 할 운명적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처럼 반복해서 내게 말했다.
“가야지. 가자.”
나는 예상했던 시간보다 4시간이나 늦어서 아파트에 도착했다. 어떻게 해야 직접 대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머뭇거린 탓도 있고, 스쿨버스에서 느꼈던 것과 실제의 위치가 많이 달랐던 이유도 있다.
벌써 노을이 물든다. 적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둑한 밤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는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아니, 사실 지금 내 생각이 어떤지 나도 잘 모르고 있었다. 위해를 가할 생각은 꿈에도 없지만, 이렇게 만나러 가는 것 자체에서부터 난 죄의식을 느꼈다.
아파트를 찾는 동안 몇 번이고 걸음을 멈췄고, 여러 번 몸을 돌렸다. 쓸 데 없는 짓이었다. 결국 난 그 여자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제일 긴장될 때가 문 앞에 섰을 때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곳에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내가 이미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벨을 눌렀다. 건물 입구도 그렇고, 현관 벨도 그렇고 보안기능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문에 붙은 렌즈로 복도의 누군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 전부인 구형 아파트였다.
첫 번째 벨에 대답이 없었다. 또 한 번 벨을 눌렀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문전박대용이어도 좋으니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 번 벨을 눌러도 안에서는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안에서 불안에 떨며 렌즈를 통해 나를 살피는 중일수도 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복도 끝까지 걸어가면 혹시나 문을 열어 살피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여자는 아직 퇴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일 컸다. 혼자 사는 여자라면 보통은 직업을 가졌을 테니까.
갑자기 여자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생각에 건물 현관까지 내려갔다. 여자가 사는 404호 우체통에 뭔가 도움이 될 정보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이쯤 되면 나는 스토커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내가 여자에게 해를 끼칠 마음이 없다고 확신해서인지 커다란 죄책감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만약 경운이라면, 이렇게 우체통을 뒤지는 행동 자체가 해를 끼치는 짓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체통도 깨끗하다. 아무것도 없었다. 404호 우체통 뿐 아니라, 모든 우체통에 우편물이건 전단지건 무엇 하나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4층으로 올라갔다.
“계세요?”
도착한 나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조심했는데도 주변이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더 세게. 차라리 당당하게 문을 두드리는 것이 이웃집에게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 조심스러운 게 더 수상할 테니까.
“아무도 없나요?”
한 번 당당해지자, 전혀 겁나지 않았다. 목소리도 높였다. 안에 여자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상황에서 굳이 문을 두드리고 부르는 이유는 옆집 때문이었다. 옆집 사람이 소란을 못 견디고, 또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문을 열면,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서 여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셈이었다. 아쉽게도 그것 또한 실패했다. 주변 어느 집도 내가 저지르는 소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요!”
문을 두드리다 못 해 아예 문고리를 잡아 틀었다. 문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는 심심해서 별 뜻 없이 취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덜컥!’하고 문이 열렸을 때, 당황한 나는 급히 닫고 물러섰다. 문이 잠기지 않았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나는 잠시 동안 복도에 선 채 저 겁 없고 당돌한 문을 노려봤다.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은 잘 안다. 그래도 나는 문고리를 다시 쥐었다. 마치 잠기지 않은 문이 초대장이라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처럼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어요?”
신발장 옆에 선 채 외쳤다. 누군가 나타나면 반응에 따라 대처할 생각이었다. 비명을 지르면 도망가고, 누구냐고 물으면 겁먹지 않도록 차분하게 설명해야지. 나는 머릿속으로 차분한 설득의 내용을 고민하며 몇 번 더 소리쳤다. 대답이나 기척은 전혀 없었다. 드디어 나는 신발을 벗었다.
깔끔한 거실이다. 소파도, 텔레비전도 없었다. 그저 거실 한 가운데에 작은 밥상과 방석 하나만 놓였을 뿐이다. 밥상 위에는 전기 커피포트 하나와 방금 씻은 것처럼 깨끗한 잔이 있었다. 그리고 전경창 너머로 내가 늘 보던 베란다가 보였다. 커튼조차 없어 훤히 드러난 베란다도 세탁기 외의 다른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스쿨버스를 탈 때는 저 세탁기조차 안 보였다.
거실 안은 온통 주황색 일색이었다. 실제 색은 아니었고, 창을 통해 들어온 노을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결과였다. 노을 때문인지 두려움을 안고 들어왔던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편안한 느낌을 주는 집이었다.
나른함을 느끼면서 다른 문을 살폈다. 척 보기에도 화장실인 곳은 내버려두고 옆에 붙은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침실이다. 작은 아파트여서 침실 외의 다른 방은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몰아치는 노을빛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방 창문도 제법 커서 정 귀찮으면 거실을 통하지 않고 침실에서 바로 베란다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침대도 창문과 바짝 붙어서 밟고 넘어가기 좋았다.
이 방도 한산했다. 침대와 책상, 노을빛. 그게 전부였다. 멀뚱하니 서서 창밖을 보던 나는 몸을 돌려 화장실 문을 열었다. 욕실 겸용으로 쓰는 이곳도 여자가 사는 집 치고는 기물이 너무 없었다. 심지어 클렌징 폼마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책상에 여자의 사진이라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다.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잡동사니도 별로 없고 사진은 더더욱 없다. 완전히 범죄가 된 나는 모든 서랍을 다 열어보고 ‘명확하게 지정할 수 없는 원하는 것’을 찾지 못 하자 허무함에 빠졌다.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위로 올라갔다. 무릎 걸음으로 침대를 지나쳐 창문을 열었다. 고개를 빼내어 베란다를 죽 둘러봤다. 여자가 항상 서 있던 곳이 보인다. 여자는 왜 아침만 되면 저곳에 서 있는 걸까?
양반다리로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만 바라봤다. 주황빛이 점점 짙어졌다. 방 전체가 붉게 물들고 공기마저 오렌지 빛에 감염된 기분이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창을 보다가 무너지듯 침대에 누웠다. 앉았을 때의 양반다리를 풀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보자니 졸음이 올 것만 같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아서 움직이는 것이 귀찮았다.
신기한 것은 지금의 기분이 생소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기시감과 달랐다. 이것은 늘 느끼는 기분이다. 그래. 스쿨버스에 타서 늘 차지하던 자리에 앉으면 이런 기분이 들었다. 행복감. 그리고 몽롱함.
“뭐야! 몇 시야!”
눈을 떴을 때 내 입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온 말이었다.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것도 부족해서 아예 침대를 차지해 잠까지 자다니.
나는 급히 침대에서 뛰어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어제의 주홍빛은 온 데 간 데 없고 하늘빛 공기가 방안을 지배하고 있다. 대체 몇 시간을 잤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창을 통해 들어서는 빛의 색채만으로는 아침 같았다.
여자는 아예 들어오지 않은 걸까? 아니면, 자고 있는 날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러 나간 것일까. 나는 잔뜩 긴장한 채 거실로 나왔다. 행여나 거실에 있을까하는 기대감을 가졌지만, 사람은커녕 누가 들어온 흔적도 없었다. 이제 내가 선택할 것은 하나였다. 포기하고 이 집을 나오는 것.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어?”
손잡이가 뭔가에 걸렸는지 돌아가지 않는다. 문을 밀었지만, 열리지 않았다. 오늘부터 시험기간을 벗어나 정상수업에 들어가는 과목이 둘이나 있는데 나는 지금 생판 모르는 여자의 집에 있다. 문을 부숴야 할까 고민했다. 어쩌면 여자가 경찰에 신고하러 갈 때, 도망가지 못 하도록 바깥쪽에서 막아버렸을 수도 있다. 나는 고민하다가 베란다로 나갔다. 여기는 4층이다. 잘만 한다면 베란다를 통해 빠져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란다로 나오자, 시원한 공기가 몰아쳤다. 확실히 아침 공기였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켜 청량감을 만끽했다. 여자는 정말로 경찰을 부르러 갔을까? 아니면, 아예 안 온 것일까? 몇몇 걱정이 청량감을 희석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베란다의 열린 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뭔가 잡고 내려갈 만한 것이 없었다. 아래층 베란다가 어느 정도 높이로 떨어져 있는지 확인했다. 내 키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무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래층 베란다로 내려가는 것은 더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거실이나 화장실에서 뭔가 밧줄 대용으로 쓸 만한 물건을 찾아볼까하는 마음에 몸을 돌렸다. 하지만, 거실로 들어가는 대신 다시 한 번 몸을 돌려야했다. 베란다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고속도로가 신경 쓰여서다. 나는 베란다 안전창에 팔꿈치를 걸치고 도로를 응시했다. 무엇을 바라고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곧 깨달았다.
저 편에서 내가 오늘 탔어야 할 스쿨버스가 오고 있었다. 비로소 지금이 몇 시인지 감이 왔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스쿨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주시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항상 앉았던 스쿨버스의 그 자리에 푸른색 가디건을 걸친 긴 흑발의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끝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주술형사도 그렇고, 난 공포물 쓰는 걸 좋아하나보다. 공포물로 흥하면 뒤가 안 좋다던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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