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적그리스도의 사생활 # 4

적그리스도의 사생활 # 3

적그리스도의 사생활 4회

[그로테스크 로드(Grotesque Road)]

첫 페이지는 정말이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제목이 ‘그려져’ 있었다. 최소 세 시간은 붙잡고 그렸어야 할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문양이 화면을 가득 채운 상태다. 이 아름다운 글자를 수첩에 새길 시간에 글 한 줄이나 더 쓰라고 말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뭐, 이 짓 한 이유를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만.

Cp.1 서울에 기괴한 그로테스크.
나 진짜 우울한 날이다. 내가 채이다니. 천하의 류혜원이 채이는 거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짱나서 눈물날라그래!! 장시혁이라고 했지?!! 나쁜 자식!!!! 초록눈에 금발이라서 이 누나가 예뻐해주니까 눈에 뵈는게 없지?! 두고 봐. 평생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줄테니까!! -3-+
― 아우 열뻣쳐!!
성질나서 아무거나 걷어찼는데 TOP(티오피)가 맞아서 날아갔다. 하필 TOP야. 난 티오피 실은데.........-_-;;
― 으악!! 누구야?!!!
헉! 난 죽었다. 쟨 우리 학교 일진 선우민이잖아?! 왜 글로 날아가고 난리야. ㅠㅠ

표지 문양의 제목이 현란해서 조금이나마 기대를 한 내가 한심하다. 그래도 다른 누구도 아닌 부장의 글에 이모티콘이 이렇게까지 적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공모전 목표가 진심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더 미치지.
슬쩍 부장을 보았다. 예상대로 부장은 초롱초롱한 눈매로 날 빤히 바라보고 있다. 칭찬 받기를 바라는 저 얼굴에 대고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다. 좀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대체 이런 내용에서 내 권능에 대한 자료가 왜 필요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잠깐!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그로테스크의 뜻이 ‘기괴하다’잖아? 소제목은 ‘어둠에 다크’였냐!

― 이게 죽을려고....... 야!!! 너 몇학년 몇반이야!!!!
선우민은 코발트블루 마의 안에 블랙 나시만 입고 죽일 것처럼 날 노려봤다.

바지는?

― 나...... 류혜민이야. 누가 거기 서 있으래?!!!
― 네가 그 유명한 류혜민이야?!!
선우민이 픽 웃더니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들어올렸다. 0.ㅇ나 어뜩해... ㅠ.ㅡ 근데 날 알아? 내가 그렇게 유명한가?
― 너 정예백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이런 글에 넣지 마요, 내 이름!

― 누, 누가 그래? 걔랑 나랑 사귀는거 니가 봤어?!!
황당황한는 나. 선우민은 믿지 안아서 내 턱을 더 바짝 들어올린다.

단어를 창조하고 있어!

― 소문대로 얼굴값하게 생겼네. 너 이거 쌩얼 맞아?
― 나 화장품 알러지 있어서 안 발라. 근데 나 진짜 예백이랑 아무 사이도 아냐!!!
― 너 누군가를 생각하느라 숨 못쉰적 있어?
― -_-;;;;;;;;;;;;(나)
― -_-;;;;;;;;;;(선우민 똘마니들)
바람둥이라고 하더니 진짜다. 오늘 첨 보는데 느끼한 맨트부터 날리는 선우민. 기가 막혀서 내가 암말 안하고 노려보니까.....
― 너 진짜 정예백이랑 안 사겨? 거짓말이면 죽는다?!!!!
― 진짜 아냐!!!!! 걔가 나 쫓아댕기는 거야!!!
선우민이 얼굴 가까이 내밀어서 물러나려고 했는데 내 턱을 꼬집는다. 아씨! 주걱턱되면 책임질거야?!!! ㅠ_ㅜ
스윽(선우민 얼굴 다가오는 소리)
얘 미쳤나봐!!!! ㅇ.0;;;; 애들 잔뜩 있는데 뭐하는짓이야?!!!
― 나 니가 정예백이랑 안 사귀는 거 알고 있어. 그리고 너. 오늘 장시혁한테 채였지?? 나 그것도 알아.
뭐? 니가 어떻게 그걸 알아?!!!!!
선우민은 키스할것처럼 얼굴 내밀었다가 붉은 입술을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중. 심장이 콩닥콩닥했다. 뜨거운 숨소리가 내 심장까지 젖어버렸다.
― 너만 알아둬. 나 사실 적그리스도야.
― 뭐??!!!! 그걸 어떻게 믿어???!!!!!!!!
― 조용히 말해 기집애야. 이따가 옥상에서 봐. 내가 하늘 날르는거 보여줄께. 장시혁 그 새끼도 내가 손가락만 팅기면 잿더미로 만들 수 있어.

일단 수첩을 덮었다.

“어때?”

부장이 두 손 꼭 모아 가슴에 붙인 채 바라보고 있다. 먼저 손가락부터 몇 번 튕겨서 이 짓을 해도 부장이 잿더미가 되지 않음을 증명한 뒤, 조심스레 말했다.

“힘들 거예요.”
“공모전?”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상대로 부장은 적잖게 실망한 표정이다. 그래도 나니까 이렇게 얘기했지, 작가가 되고서도 가끔 부실에 찾아오는 원미 선배가 봤다면 즉시 수첩을 찢어발겼을 거다.

“뭐가 문제인데?”
“음…….”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다 문제예요.”

콰앙! 예상대로 부장은 테이블을 걷어찼다.

“장난쳐? 내가 그걸 쓰느라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이제까지 쓴 글 중에서 가장 시간이 많이 걸렸단 말야!”
“그 시간의 90퍼센트는 제목 꾸미기에 투자했죠?”
“…….”
“…….”
“아냐!”
“순간의 망설임이 진실임을 증명했어요.”

내가 그나마 이 정도까지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이유는 동호회 율법 때문이었다. 아이러니인지 아니면 자멸인지 모르겠지만, 눈앞에서 길길이 날뛰는 윤혜인 선배는 부장이 되는 순간 제일 먼저 한 일이 ‘작품을 평가할 때는 위아래를 따지지 않는다.’라는 율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덕분에 MPC에서는 칭찬 일색으로 작품을 평가하거나, 눈치를 보며 말조심하는 것이 절대 금기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현 동호회 멤버 중에 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은 부장뿐이다.

지적을 제일 많이 받을 글을 쓰는 사람은 당연히 내 앞에 계신 윤혜인 부장이다. 그런 주제에 비평할 때는 제일 혹독하다. 재훈 선배는 글을 꽤 잘 파악하지만, 가증 떠는 중2병 때문에 혹독하게 비평하지 못 한다. 서현이는 근본이 심한 말을 못 하는 성격이어서 비평 시간을 침묵으로 버틴다. 나는 나대로 적당하게 넘어가는 편인 데에다 다른 사람도 아닌 부장에게 혹독한 비평을 내릴 리 없다. 오늘 한 말이 그간의 비평 중에서 제일 심한 편에 속했다.

그리고 미영이는 비평시간 자체가 의미 없었다. 미영이는 모든 글을 재밌게 읽는 녀석이었으니까. 특히 부장의 글을 제일 좋아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취향을 가졌다.

“그냥 뭐가 문제인지 지적만 해줘. 그 부분만 수정하면 될 거 아냐. 아, 이모티콘 썼었네? 이것 때문에 그래?”
“뭐예요? 있는 거 몰랐어요? 그럼, 퇴고도 안 하셨단 얘기잖아요.”

“보면 몰라? 볼펜으로 썼잖아! 너한테 얘기 들은 다음에 퇴고하려고 했어.”
“어지간하면 샤프로 써요, 부장. 보통 때 같으면 이런 말 안 하겠지만, 이거 컵 출판사 환상문학 공모전에 낼 글이라면서요. 농담 아니라 이 글 자체가 총체적 난국이란 말예요. 애초에 판타지 소설인건 맞아요?”

“응, 맞아. 아직 쓰지는 않았는데, 거기서 선우민이 류혜민을 데리고 적그리스도의 능력을 써서 지옥에 갈 거거든.”

전 그런 능력 없어요! 미리 못을 박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힘겹게 수첩을 저었다.

“그 전의 진행과정에 허점이 너무 많아요. 이것만 봐서는 이모티콘 로맨스 소설 공모전이 더 어울린다고요.”
“말이 심하잖아!”

정말 심한 건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MPC미스테리 1호. 부장은 이런 글을 쓰면서도 이모티콘 로맨스 소설류를 혐오했다. 원인은 올해 졸업해서 대학까지 포기한 채 전업작가의 길로 나선 이상현 선배님이다. 작년에 이상현 선배님에게 글에 대한 가치관을 배운 부장은 이모티콘 소설류를 끔찍한 벌레처럼 취급했다. 얼마나 끔찍하게 여겼는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소설류를 읽은 적이 없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부장이 그런 소설류를 벌레 취급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한 번도 읽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은, 이 글이 태생에서부터 우러나온 윤혜인 류 글이라는 얘기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5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상당히 잘 나가는 작가가 되었을 텐데.

“아무튼 다시 써야 해요. 이대로는 안 돼요.”

난 각오하고 냉담하게 말했다. 의외로 부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첩을 받아 쥐었다.

“실은 부장도 짐작하고 있었죠?”
“뭘?”

“제목 그렇게 꾸민 이유가 뭐예요? 원미 선배가 그 수첩 찢을까 봐 공들인 거 아녜요? 원미 선배는 그런 무늬 엄청 좋아하시니까 차마 못 찢게 하려고.”
“…….”
“…….”
“아냐!”
“…….”
“쳇!”

부장에게 반한 이유가 뭔지 기억났다. 바로 저 투덜거리는 얼굴이 귀여워서였어!

“그럼 어떻게 쓰라고? 나 이번 공모전에 꼭 붙을 거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각오는 좋은데 나로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진짜 붙고 싶단 말야!”

부장이 짜증내듯 소리치는 순간, 오후 수업 시작을 알리는 멜로디가 흘렀다. 난 멜로디가 끝날 때까지 멍하니 부장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부장의 모습에 적잖게 당황했다.

부장은 글 못 쓰는 원인이 내게 있는 것처럼 화난 얼굴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것까지는 평소 부장의 모습이니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눈은 평소와 달랐다. 금세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울먹거리는 눈이다. 난 부장에게 저런 눈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 없다. 윤혜인 부장이 눈물 머금은 눈을 갖고 있다니!

“부장.”

부장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모전에 당선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걸까?

“혹시 무슨 일 있어요?”

내 물음에 부장은 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곤 파리 쫓을 손을 저어 나가라는 뜻을 보였다. 내가 부실을 나갈 때까지 부장은 꼼짝 않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부실 문을 등진 채 서서 고민했다. 늘 호통만 치고 제멋대로인 선배인 탓에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 없었는데, 부장은 왜 MPC의 성격을 판타지 소설 창작 동호회로 바꾸었을까? 처음으로 보인 부장의 조급한 모습 때문에 이것저것 신경 쓰였다.

이미 각 교실에 선생님이 들어가 있을 시간인지라 일단 움직여야 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부장의 목적이 뭘까?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을까? 아니다. 그러기엔 글이 너무 앳돼. 부장 글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년 이상 연마한 수준이 못 된다. 작가가 꿈이라면 최소한 중학교 때부터 습작을 썼어야지.

혹시 이상현 선배님이나 조원미 선배에게 영향을 받을 걸까? 그것도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작년부터라도 습작을 썼어야 옳다. 내 생각에 부장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시기는 올해다. 그것도 MPC의 성격을 바꾸는 그 순간부터일 가능성이 높다. 부장은 자기 글을 누구에게든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습작이란 있을 수 없다.

결론을 내렸다. 난 교실 문 앞에 서서 이를 악 물었다.

부장의 글을 당선시키자. 적그리스도의 권능을 써서라도 부장 글이 공모전에 당선할 정도의 수준으로 만드는 거야. 그러면 이유를 알게 되겠지.

어떤 권능이 필요한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든 도움이 되는 권능은 있을 것이다. 굳이 이런 권능이 없었더라도, 나는 부장의 글을 볼 때마다 비슷한 생각을 하곤 했다. 짝사랑하는 만큼 부장의 실력 향상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 이런데 쓸 권능 같은 게 없다면 내 힘으로라도 부장 실력을 키워보겠어!

“예백아, 좀 도와줘.”

문 앞에서 딴 생각을 하던 중, 목이 졸린 사람처럼 힘겨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서현이가 한 품 가득 묘목을 안고 서 있었다. 검은 비닐봉투에 든 묘목은 부원 전체가 하루 종일 심어도 남을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뒤늦게 식목일 계획을 떠올리며 서현이에게서 봉투를 빼앗았다.

4회 끝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이전 1-3회는 수정본으로 교체했습니다. 행여 또 원고를 건드릴까 겁나네요. 그 때마다 다 일일이 수정해야 할 테니... ㅠ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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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김현 2011/04/01 04:10 # 답글

    전 이게 만우절 포스팅인줄 알았어요.

    ... 읭?!
  • 레디오스 2011/04/02 03:40 #

    만우절 포스팅은 5회로 잡고 있었는데, 정말 5회를 못 올려버렸...;;

    이로써 만우절 포스팅 성공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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