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적그리스도의 사생활 # 3

적그리스도의 사생활 # 2

적그리스도의 사생활 3회

4월 4일. 오후 6시 25분.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난 옥상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망연히 부장을 응시했다.

“빨리!”

부장이 재촉했다. 헤죽 웃고는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는데, 젓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부장 얼굴이 일그러진다. 마지막 세 번은 그 표정이 예뻐서 일부러 저었다.

“정말 싫은 거야?”

부장은 무서운 얼굴―물론 부장만의 생각이다―을 유지한 채 양 어깨를 바짝 세우고 다가왔다. 가슴끼리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접근하는 부장의 행동이 좋기는 했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고 난감한 기색을 내비쳐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면 다시는 이런 즐거운 협박을 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난 한 걸음 물러서며 소리쳤다.

“무섭단 말예요!”
“뭐가 무서워! 넌 적그리스도잖아!”
“예수님도 죽기 전에는 엄청 무서워하셨거든요?”
“누가 죽인다니? 그냥 올라가 있기만 하라는 거잖아!”

그렇다. 지금 부장은 나에게 옥상 난간 위에 서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부장이 손끝으로 지정한 위치는 폭이 10센티미터쯤 되는 무척 좁은 난간이었다. 난간 바깥쪽은 내가 부장의 스타킹 갈아입는 모습을 보았던 지점―이른바 땅바닥―까지 논스톱으로 추락할 준비를 모두 갖춘 공간 뿐. 명령을 받는 순간, 나는 부장이 어제 민망한 꼴을 보인 벌로 ‘추락사’를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강하게 거부하는 중이다.

“알았어! 내가 손 잡아줄게. 그래도 안 돼?”

부장은 대뜸 내 손을 잡았다. 곧 결혼반지를 꺼낼 남자 같은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실험을 하고 싶어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부장의 체온에 마음이 약해져 수락하고 말았다.

“정말 잡아줄 거죠?”
“잡고 있잖아. 걱정 말고 올라가.”

부장의 손을 꼭 잡은 채 조심스레 난간에 발을 걸쳤다. 난간 위에 올라간 상태에서 부장과 손을 맞잡고 있자니,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힌 꼴불견 자세가 되었다. 부장은 두 팔을 높게 치켜드는 것으로도 부족한지 아예 발끝을 세우며 내가 좀 더 허리를 펼 수 있도록 도우려 했다.

“아, 내가 힘들어서 더는 안 되겠다.”

부장은 세웠던 발바닥을 다시 내리며 긴 한숨과 함께 끔찍한 명령을 내렸다.

“그냥 그 상태에서 뒤로 좀 기울여 봐.”
“…….”

한참 생각하다가 간신히 물었다.

“진짜요?”
“응. 기울여 봐.”
“그러다 저 떨어지면 어쩌라고요?”
“내가 꽉 잡아줄게.”

짝사랑하는 여인의 따스한 손을 쥐느라 콩닥거리던 가슴이 이제는 쿵쾅거렸다. 부장이 이 예쁜 외모로 어째서 남자친구가 없을까 궁금했는데, 다들 이렇게 갔나 보다. 몇 번을 망설이고 기울이는 척 하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한 끝에, 나는 정말로 부장 말대로 몸을 젖혔다. 만약 부장이 손을 놓치면 텔레포트로 되돌아가야지. 바로 이 생각을 하는 순간에 부장이 손을 놓았다. 놓친 게 아니라 놓았다!

“어어? 악!”
“파이팅!”
“헉헉헉헉헉헉헉헉헉헉헉!”

뭐가 파이팅이야! 나는 부장 뒤쪽에서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로 숨을 몰아쉬었다. 옥상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텔레포트를 한 것이다. 뒤에서 내 숨소리를 들은 듯 부장이 고개를 돌렸다. 실망감이 가득한 얼굴이다.

“아, 뭐야아?”

뭐냐니! 그 표정 뭐예요? 제가 저 아래에서 나치 마크 포즈를 취한 시체가 되기를 바라기라도 한 겁니까!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노려보고 있는데, 부장이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자기 무릎을 품에 안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곤거리는 한 마디가 가슴에 맺혔다.

“너, 못 날아?”
“못 날아요! 그런 건 떨어뜨리기 전에 먼저 물어봐 줘요!”

부장은 무릎 사이에 뺨을 파묻고 울상 지었다.

“아깝다. 손잡고 같이 날고 싶었는데.”

윽. 그건 나도 해보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이 사태를 애련의 로맨스로 처리할 요소는 못 된다. 한동안 뚱하게 부장을 바라봤다. 내 어필을 무시한 채, 눈앞의 로맨틱 싸이코패스는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침묵했다.

소용돌이같은 길을 만든 흑발 속에 가마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난 부장의 향기로운 정수리를 바라보며 같이 침묵했다. 샴푸향이라는 건 알지만, 부장 머리카락에 걸러진 이 냄새는 파크리트 쥐스킨트의 ‘향수’에 나오는 궁극의 향처럼 매혹적이었다. 부장의 향을 좀 더 음미하려고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부장이 고개를 들었고, 난 사래 들렸다.

“그럼 넌 할 줄 아는 게 뭐야?”

갑자기 대단히 쓸모없는 적그리스도가 된 기분이다.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벽 뚫고 지나가건 텔레포트를 하건 넌 안 될 거야, 아마.

“뭐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요, 부장.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아주세요.”

투덜댔다. 부장의 실망하는 얼굴을 보니 괜히 울화가 치밀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좋지만은 않았다. 부장은 한숨을 뱉더니 내 심장을 난간 너머로 던지는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따로 만나는 의미가 없는 걸.”

우리의 은밀한 만남은 하루 만에 파경국면을 맞이했다.


4월 5일. 오전 0시 50분.

역사적인 날이 될 시간을 확인한 후 핸드폰 폴더를 덮었다. 저녁때의 사건 후, 나는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대단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것은 무려…….

척!

하늘을 날아가는 법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해.”

나는 낮게 중얼거리며 15층 아파트 옥상 난간에 발을 걸쳤다. 쌩쌩 부는 바람이 오늘따라 매서웠다. 이것은 절대 자살이 아니다. 이 상황에 이르도록 많은 고민을 했고, 하늘을 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까지 갖게 되었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날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텔레포트.

추락하기 전에 다음 위치로 쉴 새 없이 텔레포트를 하면 날아가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나는 지금 그것을 시험하려고 여기에 섰다. 정 위험하면 다시 이 자리로 텔레포트를 하면 되니까 문제없다.

“좋아.”

바깥쪽으로 두 발을 모두 내놓고 난간 위에 앉았다. 밑을 보니 정말 아득했지만, 죽을 염려는 없기 때문에 걱정은 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천천히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퍽!

떨어지기도 전에…… 아니, 난간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쌍코피가 터졌다. 나는 다시 옥상 쪽으로 자빠져 나뒹굴었다. 누군가가 발로 내 얼굴을 내지른 결과였다.

“왕이시여.”

내가 앉았던 난간 위에 가브리엘이 서 있었다. 금빛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잘록한 허리 뒤에서 바람에 흐트러진다. 티 없이 맑은 피부에 짙은 속눈썹, 도톰한 입술과 갸름한 얼굴선. 그것만 보면 확실히 여자 같은데―그것도 엄청난 미모의!― 속이 훤히 비치는 타이트한 우윳빛 블라우스에서 드러나는 몸매는 남자임을 증명했다. 반투명한 블라우스 속 하얀 피부에 가슴굴곡과 복근 등이 훤히 보였다. 비록 전문적 트레이닝을 한 사람처럼 근육이 울퉁불퉁 솟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저렇게 희미한 굴곡으로 꽉 조인 몸매가 더 매력적이었다. 특히 매끈하고 긴 다리가 부러웠다. 사실 지금 제일 부러운 것은 등에 달고 있는 하얀 날개지만.

세 번째 만남이어도 여전히 나는 가브리엘의 미모에 넋이 나갔다. 그리고 첫 만남 때처럼 가브리엘의 또 한 가지 특성에 남은 혼도 빠져나갔다.

“대체 뭐가 불만이시옵니까? 귀한 옥체, 이따위로 굴리시면 저도 생각이 있나이다?”

가브리엘의 성격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꿈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자려고 했는데 싸대기를 날렸었다. 그 때 생각하니까 갑자기 화가 나네.

“오해예요! 자살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말 까시옵소서. 저는 왕을 모시는 충실한 악마, 가브리엘. 왕께서 어려워하실 이유가 없사옵니다. 근데 뛰어내리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개뿔이 오해이옵니까?”

“들어봐요. 아니, 들어봐……요. 그냥 제 마음대로 높여서 말할래요. 말 낮추는 게 더 불편하단 말예요. 아무튼 정말로 자살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변명이랍시고 해보시옵소서.”

“전 텔레포트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떨어지는 순간에 1미터 앞으로 텔레포트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 1미터 앞으로 텔레포트! 계속 그런 식으로 텔레포트를 하면 날아가는 것과 똑같잖아요. 제가 텔레포트를 하는 횟수에 제한이 있거나 하진 않은 것 같은데…… 아닌가요?”

가브리엘은 잠자코 내 말을 듣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 쥐었다. 부장의 손보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마에서 얼굴로…… 그리고 턱까지 서서히 가라앉자, 가려졌던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험악한 눈매였다.

“이 멍청한 자식이! 제발 정신 좀 차……!”

버럭 외치던 가브리엘은 급히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몇 번 심호흡을 하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차분하게 말했다.

“왕이시여. 제발 심기를 바로 잡으시옵소서.”

‘정신 차려’와 ‘심기를 바로 잡으시옵소서’가 같은 뜻이라는 것을 방금 처음 알았다.

“뭐 잘못됐나요? 텔레포트로 그렇게 하면 날 수 있잖아요.”
“가속도에게 작별인사는 받으셨사옵니까?”
“네?”

“가속도를 버려두고 텔레포트 하실 수 있느냐는 말이옵니다.”
“그게 무슨……?”

“떨어지는 순간 중력의 영향을 받고 추락 가속도를 얻게 되옵니다. 그 때 텔레포트를 해도 관성의 법칙은 그대로 적용되어서 다음 위치의 추락 가속도에 영향을 끼칠 것이옵니다. 그렇게 여러 번 텔레포트를 하는 동안, 왕께서는 중첩된 추락 가속도 디버프를 끌어안고 계시다가 땅에 착지하는 텔레포트를 사용하실 때 개떡이 되시겠지요.”
“헉!”

“모르셨사옵니까? 그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 생각하시었습니까? 네네, 마태복음 18장 18절.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땅 딛고 계실 때 멀쩡하니까 하늘 쪽도 뭔가 될 것 같으셨겠지요. 출애굽기 8장 26절. 그리는 안 되옵니다, 왕이시여.”

가브리엘의 말투는 비아냥거림만 가득했다. 더는 듣기 싫어서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악마가 그렇게 성경 구절 인용해도 돼요?”
“천사도 잘만 욕합니다.”

“저 진짜 못 날아요?”
“옛날 생각이 나는 군요. 동생은 어디 계십니까, 예백 라이트 씨?”

“비행기 만들어달란 소리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천사…… 아니, 악마는 날 수 있는데 왕인 저는 왜 못 나는 건데요!”
“아주 그냥, 호랑이가 파리보고 부러워 뒈지겠네 하시옵니다? 연옥과 세상에 널린 모든 악마를 지배하는 왕께서 고작 이런…….”

여기까지 말하고서 가브리엘은 하얀 날개를 아름답게 펄럭거리며 창공을 우아하게 날았다. 뿐만 아니라, 날개를 펄럭거릴 때마다 은빛 가루가 몽환적으로 여운을 남기며 밤하늘에 흩뿌려졌다.

“날아가는 행위 따위를 부러워하시옵니까?”

갑자기 엄청나게 부러워졌어! 너, 일부러 그렇게 날았지? 단박에 부럽다고 말하기가 싫어졌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정말로 짜증나는 놈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은가루 휘날리며 하늘을 배회하는 가브리엘에게서 등을 돌렸다.

“알았어요. 앞으로는 이런 짓 안 할게요.”
“다음부터는 힘을 쓰실 때 공부 좀 하고 쓰시옵소서.”

내가 가속도 얘기 나올 때부터 저 소리 들을 줄 알았다.


오후 1시 30분.

“땡! 이제부터 지각!”

부장은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다른 손으로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 미영이가 장단 맞추듯 책상을 드럼처럼 두들긴다. 나는 끼적거리던 설정집 노트를 덮었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부장은 점심시간이 되기 10분 전에 ‘식목일 특집 비상 모임 령’을 내렸다. 어제 그 사건 후로 부장과 난 한 번도 대화를 하지 못 했다. 그렇기에 비상 모임을 기회 삼아 소원했던 관계를 해결할 셈으로 재빨리 부실을 찾아갔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장은 1시 29분에 들어왔다.

MPC 회원 누구도 아직까지는 부장과 나의 은밀한 만남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부장과 어제 얘기를 나누지 못 한 상태…… 고 뭐고 이제 만난 지 1분이 지났는데 무슨 대화를 한단 말인가!

“식목일 모임은 대체 뭐예요, 부장? 나무라도 심게요?”

작게 투덜거렸다. 순간, 부장이 또 한 번 책상을 후려갈기며 “바로 그거야!”라고 소리쳤다. 그 때까지 책상을 두드리던 미영이가 벌떡 일어서며 “우오! 그겁니까?”라고 소리쳤다. 우리 부원 중에서 라이트 노벨 쪽에 가장 많은 재능을 가진 녀석이라면 단연코 미영이일 것이다. 존재 자체가 일본 열혈물이다.

부장은 부실에 들어올 때 갖고 온 노트를 펼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MPC는 판타지 창작 동호회라고. 그것도 출간을 목적으로 하는! 책을 뭘로 만드니? 종이지? 종이는 뭘로 만들지? 나무야, 나무! 그런 우리가 식목일을 무시하면 동호회로서의 근본 취지에 어긋나는 거라고.”

미영이와 나는 부장의 목소리를 건성으로 들으며, 노트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커다란 글자를 멍하니 보았다.

― Moonhak Pantasy Club

“…….”
“음.”

미영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책상을 후려쳤다.

“부장! 그냥 동호회 약자를 바꾸는 겁니다! 나, 서미영! 보다 좋은 약자를 내일까지 제출하겠습니다!”
“왜?”

부장이 서미영을 잡아먹을 듯 흘겼다. 부장은 미영이의 얼굴 앞에 끔찍한 영단어가 새겨진 노트를 내밀었다.

“이게 이상해. 뭐 문제 있어?”

미영이는 비굴해졌다.

“없습니다!”

없긴 뭐가 없어! 참다못해 내가 나섰다.

“문학은 그렇다 쳐도 판타지의 앞 글자는 P가 아니라 F예요, 부장.”

내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미영이도 지원사격 했다.

“전 문학도 신경 쓰입니다! 우리는 달을 연구하는 환상의 동호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시, 시끄러워! 논지를 흐리지 마! 지금은 나무를 심는 얘기를 하는 중이잖아!”

그럴 거면 애초에 이걸 쓰지나 말든지. 미영이와 난 입을 꾹 다물고 무언으로 항의했다. 부장이 쓴 얼토당토않은 단어를 노려보는 것으로.

그 때, 서현이가 들어왔다. 서현이는 반 애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점심시간이 되면 최소 다섯 명 이상에게 둘러싸여 밥을 먹어야 한다. 추종자들을 일일이 챙겨주느라 늦은 것이 분명하다.

“미안해요, 부장. 늦었어요.”
“그래! 늦었어, 장서현!”

부장은 즐거운 표정으로 서현이에게 호통 쳤다. 하늘이 무너지기 전에 빠져나갈 구멍이 생겨서 좋겠군. 나는 부장이 서현이를 구박하는 동안, 이 괴상한 단어를 볼펜으로 벅벅 그어서 지워버렸다.

“나머지는 뭐 하느라 안 오는 거야? 내 메시지가 우습게 보이나 본데, 이번 기회에 기강부터 바로 잡아야겠어!”
“나머지라고 해봤자 재훈 선배만 안 왔는데요.”

“나도 알아! 지각한 사람은 벌로 묘목을 구해 와. 예백이 네가 재훈이한테 가서 그대로 전하고, 오늘 수업 끝나자마자 다시 부실로 모인다. 실시!”
“묘목이요?”
“식목일 특집이래.”

내 말에 서현이는 대뜸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장이 아무리 황당한 제안을 해도 제일 먼저 납득하는 녀석이 서현이였다. 그래서 부장은 특히 서현이를 아끼는 편이었는데, 난 저 독실한 카톨릭 신자께서 왜 이런 동호회에 남아 계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서현이는 이렇게 정신 산만한 동호회와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다.

서현이와 재훈 선배가 묘목을 구해 오면 다시 회의를 잇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부장은 해산을 명령했다. 그리고 막 부실을 나가던 나를 불러 세웠다.

“예백아, 너 잠깐 대기. 재훈이한테 추가로 전할 게 있어.”
“네?”

서현이와 미영이는 잠깐 나를 돌아보고는 그대로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제야 대화할 기회가 생겼군. 나는 안도 반, 불안 반의 감정을 안은 채 문을 닫았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부장이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문자 왜 씹었어?”
“네에?”

난 깜짝 놀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급히 문자 메시지 함을 확인했지만, 어제 이후로 부장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직접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정말로 안 왔어요. 잘못 보내신 거 아녜요?”
“안 보냈어.”

뭐냐고요! 퀭한 눈으로 응시하자, 부장은 자신의 핸드폰을 내 얼굴에 처박았다.

“왜 문자 안 보냈냐는 얘기야! 내가 어제 분명히 말했지?”
“뭐, 뭘요? 무슨 말씀 하셨는데요?”
“따로 만나는 의미에 대해 고민했잖아! 그런 소리를 들으면 적어도 밤에 메시지 정도는 보내서 의논해야 하는 거 아냐? 기다린 건 아니지만 안 오니까 열 받잖아!”

아아. 갑자기 감이 잡히는 게 있다. 왜 이런 억지를 쓰면서까지 나무를 심으려하나 했더니, 수업 내내 메시지를 기다렸나 보다. 식목일은 핑계였군. 아니, 그럼 점심시간 끝나자마자 바로 와서 대화를 하던가! 1시 29분이 뭡니까, 29분이! 난 밥도 안 먹고 와서 기다렸다고요!

“죄송해요, 선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연락 못 했어요.”
“날지도 못 하는데 앞으로 어쩔 거야?”

진짜 묻고 싶었다. 날지 못하는 게 왜 죄가 되는 건지. 아마도 선배는 내 능력을 멋대로 짜 맞춰서 어떤 글을 쓰나 보다. 멋대로 캐릭터에게 날아가는 능력을 부여해놓고 내가 거기에 맞춰서 날아가길 바란 것이겠지. 그럴 때는 글을 고치셔야지, 내가 날아가는 몸으로 고쳐야 하는 겁니까!

“전 모르겠어요, 부장.”

부장은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보며 혀를 찼다. 주눅 들어 몸을 움츠리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부장이 아닌 내가. 대체 어쩌다가 저런 부장을 짝사랑하게 된 거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저런 부장의 태도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내 속마음이었다.

“일단 플랜부터 검토하자.”

부장은 마의 속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내밀었다. 수첩에서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짐작이 간다. 누군가 날아다니는 글이 담겨 있겠지.

“읽어 봐.”
“네.”

심호흡을 하고 수첩을 펼치는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글이 나를 반겼다.

3회 끝

레디 오스 성화 올림(그러니까... 만우절에 수정)

적그리스도의 사생활 # 4

핑백

덧글

  • 개발부장 2010/02/13 09:11 # 답글

    오오 재미있습니다 이거. 정일휘에게도 이런 파릇파릇한 시절이 있(거기까지)

    ...랄까, 저 이름 맞는 찾아봤는데 진짜로 정일휘였어--;;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이 기억력으로 공부를 했으면 사법고시도 합격하지 않았을까요 저?
  • 레디오스 2010/02/13 09:42 #

    대, 대단합니다! 입사행 모두 무난했으리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참에 이름을 그냥 정일휘로 바꿀까요? -ㅁ-;;
  • 마스터 2010/02/13 15:28 # 답글

    강휘 성격은 엄마가 컨트롤씨 컨트롤피 해줬군요[........]

    왠지 글 성격으로 보아 펭귄군도 어디 나오면 어울릴 거 같은데 계획 없으십니[.....]
  • 레디오스 2010/02/13 16:09 #

    현재 진행상황을 보면...

    검은새가 본문을 이길 유머를 갖추지 못 할 것 같아요! ㅠ_ㅜ
  • 삼손 2010/02/13 19:20 # 답글

    마스터님//피는 무슨 단축키인가요[..]

    그런데 설마 이것도 메... 아니 중... 아니 아무튼 그렇게 되진 않겠죠?
  • 마스터 2010/02/13 21:36 #

    아, 피가 아니라 브이죠;;
  • 레디오스 2010/02/15 06:39 #

    계약이 되었다면 제일 먼저 나왔을 수도 있는 글이었겠지만...

    퇴짜 맞았어요. 라는 이유로 계약한 글이 우선순위인지라 얘는 좀 늦을 것 같아요. ㅠ_ㅜ
  • 다크엘 2010/10/13 18:04 # 답글

    이름이 예백인데 왜 정일휘인가 순간 고민했습니다. 가만히 고민하다보니 코스모스 스토리에서 본 것 같네요. 읽은지 워낙 오래돼서 내용도 기억이 안나는데 이름만 기억나다니...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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